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경래의 난 (문단 편집) == 기타 == * [[임상옥]]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홍경래가 가장 우선적으로 포섭하려 했던 인물이 당시 조선 제일의 거상으로서 상권의 주도를 잡고 있던 임상옥이었고 실제로 수행자 겸 일꾼으로 위장취업하여 임상옥의 호감을 얻는 회유책을 쓰려 했지만 홍경래를 꿰뚫어 본 임상옥의 통찰안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자 홍경래를 막고자 관군을 지원하는 입장에 섰다. 만일 홍경래의 난이 성공하면 조선 팔도의 백성들이 난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의 여파의 피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막아선 것으로 보인다. * 상술한대로 홍경래에게 항복하지 않은 유일한 수령인 가산군수 정시의 시신을 수습한 관기 최연홍은 난이 진압된 후 의기(義妓)로 칭송받고 면천되는 포상을 받았다. 지역 기생들에게 '운낭자'라고 불리며 [[논개]], [[계월향]]처럼 위대한 선배 기생으로 추앙받았으며, 고종 시대 어진화사 [[채용신]]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 사후 병조판서에 추서된 정시와 달리 투항한 수령들은 반대 급부로 더욱 큰 벌을 받았다. 특히 상술한 [[선천군|선천]]부사 김익순은 반군에 제일 먼저 투항했다가 토벌군에 재투항 후 김창시의 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줘서 부탁한 다음 자기의 공으로 돌려 용서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목의 원래 소유주에게 돈을 미리 주지 않는 바람에 들통나서 처형됐다. 이 김익순의 손자가 바로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김병연]]으로, 그가 평생 삿갓을 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할아버지인 김익순인 셈이다. 김익순은 오랫동안 죄적(범죄자 명부)에 적혀있다가 [[1907년]] [[11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1908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다. 최종적으로 [[1908년]] [[4월 30일]]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 * 그 외에 태천 현감 유정양도 반군이 오자 튀었다가 난이 대충 멎어들 무렵에 와서는 군사들로 의심나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는데 그 수가 '''41명''' 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고작 유배형이었다. * [[북한]] [[조선력사]]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평안도 농민전쟁'이라 부르며, 임술농민폭동([[임술민란]])-갑오농민전쟁([[동학 농민 혁명]]) 이전의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홍경래의 아내는 처형당한 것이 맞으나 아들들이 처형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들이 난이 진압된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홍기조]]가 홍경래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다. * [[위키백과]]에서는 묘하게 홍경래의 난에 관하여 한국어 문서 이외에 [[토막글]]이기는 하나 [[태국어]] 문서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